직업의 지리학, 엔리코 모레티
현재 미국의 경제와 사회 구조적 불평등을 지리의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다.
과거 미국 경제의 핵심은 제조업이었다. 그러나 세계화 이후 제조업은 값싼 인건비를 향해 국외로 이전하였다. 그 결과 디트로이트와 같은 제조업 기반의 도시에 일자리가 사라졌고, 제조업이 불러일으킨 파생 일자리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저자는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상에 세계화는 부분적인 원인이라 지적한다. 제조업 특성상 기술이 발달할수록 제품 생산에 필요한 근로자 수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 경제의 핵심은 과거 제조업에서 혁신 부문으로 이동하였다. 혁신 부문은 제조업과 달리 미국 내 특정 지역에 뭉침 현상이 강해 세계화에도 혁신의 핵심인 R&D분야는 국외 외주가 거의 드물다. 이는 뭉쳐있을수록 노동 시장, 전문적 서비스 제공자들의 존재, 지식 전파 등의 측면에서 이점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혁신 부문은 제조업보다 더 많은 파생 일자리를 창출한다. 과거 제조업 일자리 1개가 1.6개의 파생 일자리를 만들었다면, 첨단 기술 일자리 1개는 첨단 기술 바깥에서 5개의 추가적인 일자리를 창출해 낸다. 그 이유는 첨단 기술자들의 보수가 매우 후하기 때문에 더 많은 소비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첨단 기술 활동에는 많은 지역적 사업 서비스가 요구되며, 서로 가까이 자리 잡아 밀집 효과가 강력하고, 혁신 기술이 창조되는 작업장은 여전히 인간 노동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첨단 기술 분야에 미국 전체 경제가 달려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혁신 부문의 밀집효과 때문에 미국 사회에선 지리적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 시애틀의 마이크로소프트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절망의 도시였던 시애틀은 마이크로소프트 이전으로 혁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이전으로 소프트웨어 기술자들과 프로그래머들이 대규모로 집결해 오고, 그 결과 다른 첨단 기술 산업 시작하려는 이들도 시애틀로 오고, 일자리를 원하는 소프트웨어 기술자들과 프로그래머들 역시 시애틀에 오는 과정이 마치 자석처럼 연달아 달라붙어 증폭된다. 그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큰돈을 번 직원들이 퇴사해서 독자적 사업을 시애틀에서 탄생시킨다. 조사에 따르면, 전직 사원이 차린 신생 사업체가 약 4000개로 추정되고, 서비스 근로자 일자리 약 12만 개를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학력을 가진 일자리 약 8만 개 만든것으로 예상된다. 하나의 혁신 일자리가 한 지역을 뒤바꿔버린 것이다.
그러나 혁신 부문이 미국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미국의 특정 지역에 일자리가 몰리는 현상이 벌어지고 지역 간의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 혁신적 기업과 혁신적 근로자들이 그곳에 계속 모여들어 승자는 갈수록 더 강해지지만, 패자는 더 불리해지는 경향인 다중평형 상태가 일어나고 있다. 지역 간의 격차가 어느 정도 나면 교육 수준이 제일 높은 지역과 제일 낮은 지역 간의 봉급 차이는 50%로, 두 곳의 노동 시장은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한다. 또한, 보스턴에 사는 고졸 근로자가 플린트의 대졸자보다 더 임금이 높다. 이는 지역에 따라 임금 격차가 너무 커서 교육 수준에 따른 계급 차이를 압도할 정도이다. 큰 노동시장 차이는 다른 측면에서도 큰 격차를 발생시킨다. 가령 기대수명도 다른 나라와 미국을 비교한 것 보다 지역별로 차이가 더 두드러진다(기대수명이 제일 높은 지역은 81세, 제일 낮은 지역은 66세). 지역 간의 불평등은 차이가 매년 더 벌어지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지리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의 장소 기반 정책으로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지역을 도시 지역 개발로 고용주 유치와 근로자 유치에 유리하도록 투자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또한,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낮아지는 미국인의 이동성을 이주 바우처를(이주하는 비용의 일부를 제공) 통해 이동성을 늘려 실업률을 줄여나갈 수 있고, 이는 지역 간의 양극화를 줄이는 해답이라 주장한다. 저자는 지리적 불평등 이외에도, 미국은 인적 자본을 충분히 창출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교육의 질 개선과 숙련된 이민자들의 입국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분석과 주장은 미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첨단 부문에 집중된 특정 지역과 나머지로 구분할 수 있다면, 한국의 경우 수도권과 나머지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정 수도 이전 등 수도권 집중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은 지지부진하고, 균형 발전에 실패하고 있다. 미국 시애틀과 같은 사례처럼 하나의 첨단 일자리가 자석처럼 승수효과를 낼 수 있도록 이를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가능하게 하려면 저자의 제안을 고려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