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짜오, 씬짜오 - 최은영
소설처럼 현실에서도 사과할 수 있다면
작년 시민사회단체 주최로 열린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모의재판의 판결은 다음과 같다: 한국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고 베트남 피해자에게 배상하라. 올해 4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은 한국 정부에 최초로 진상규명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올해 9월 국방부는 이를 부인하였다. 국방부 보유 자료에 관련 내용이 없고 한국-베트남 정부 간 공동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나 여건이 아직 조성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최은영 작가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능하다. 관계의 시작이나 진행보다 끝이 나버렸지만 영원히 퍼지는 관계의 잔향을 주로 다룬다. 단편 <씬짜오 씬짜오> 역시 깨져버린 관계가 소설의 중심이지만 베트남 가정과 한국 가정의 우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참혹한 과거사가 등장인물의 관계 안으로 등장했을 때, 읽는 독자는 역사적 비극을 과거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현재의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의 엄마와 베트남인인 응웬 아줌마는 낯선 독일 생활에서 깊은 우정을 나눈다. 적응이 힘든 엄마를 응웬 아줌마는 세세하게 보살펴주고, 틀어지고 있던 부부관계도 응웬 가족과 함께 있을 때면 다정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중한 관계는 어린 주인공 말 한 마디에 다시 봉합될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깨져버리고 만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라는 말은 학살을 직접 목격한 응웬 아줌마에게 상처를 주었고, 어쩔 수 없었다는 아빠의 말에서 두 가정의 관계는 엄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는 어쩔 수 없는 끝을 예감하게 한다.
20세기 단편 소설의 거장인 윌리엄 트레버의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는 이와 유사한 단편이다. 오래전부터 조이스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더모트의 집으로 찾아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IRA의 폭탄테러 사건을 계기로 더모트는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이 받아온 핍박 때문이다”라고 살인을 정당화하자 이들의 오랜 우정은 끝이 나고야 만다. 영국과 북아일랜드 분쟁의 역사가 개인의 우정에도 영향을 끼치고 만 것이다. 조이스와 더모트는 서로의 상반된 주장 때문에 다시는 우정을 이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씬짜오 씬짜오>는 트레버의 소설과 차이점을 보인다. 첫째, 엄마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당화하지 않고 바로 사과한다. 이후에도 관계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잦은 방문으로 노력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서로에게 더는 상처 주지 위해 자발적으로 멈추고 만다. 이는 참혹한 과거사가 얼마나 개인의 삶에서 회복하기 어려운지 보여준다. 둘째, 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자세히 묘사한다. 엄마는 응웬 아줌마와의 우정이 멈춘 뒤로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벽을 바라보곤’ 한다. 그만큼 소중하던 우정을 깨뜨린 과거의 비극에 대해 감정적으로 울린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선 우정의 단절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사과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라고 자신의 무지가 잘못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또한 엄마는 응웬 아줌마를 생각하며 가을부터 뜨기 시작한 목도리, 털모자, 털장갑을 주인공을 통해 전달해준다. 말로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미안한 감정과 우정에 대한 소중함을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뜬 선물로 대신한 것이다. 선물을 받은 응웬 아줌마는 울음을 참는다. 서로의 마음을 전달받았지만 엄마와 응웬 아줌마는 다시 만나지 않은 채로 헤어지고 만다.
우리는 받길 원하는 사과도 있고 해야 하는 사과도 있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역사가 역사로만 존재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로 등장할 때 서로 사과를 나누고 상처를 안아도 쉽게 봉합하기 힘들다는 것을 <씬짜오 씬짜오>는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현실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피해자에게 사과를 건넨다. 그러나 정부는 유감 표명 정도로 그치고 있고 책임과 배상에 대해 회피하고 있다. 결국 현실은 피해자의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만을 남기고 있어 소설을 읽고 나면 씁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