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서평

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권열 2020. 3. 23. 23:01



  <자발적 복종>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복종에 대해 지적하는 책이다. 책의 절반은 ‘자유’를 강조하고, 나머지 절반은 ‘자발적 복종’이 왜 일어나는지, 군주들이 어떻게 자발적 복종을 끌어내는지 설명한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텍스트의 논리 구조는 탄탄하지 못하다. 그러나 다음 단 하나의 사실이 모든 아쉬움을 사라지게 하고 읽을만한 가치를 부여한다. <자발적 복종>은 1548년 쓰였다. 

  내용은 간단하다. 저자는 자유를 타고난 속성으로 인지한다. 반대로 복종은 노예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습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군주는 성대한 파티나, 돈과 곡식, 술을 뿌리는 등 단순한 쾌락으로 민중들의 눈을 멀게 한다. 민중은 그런 독재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저자는 민중이 독재자에 대한 굴종에 동의하지 않으면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진다고 지적하고, 천부의 권한인 자유를 되찾는 것이 짐승에서 다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적 텍스트와 문학적 인용을 하는데, 이는 그가 살던 시대인 르네상스의 영향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책 바깥인, 책이 쓰인 16세기를 생각해보자. 16세기는 르네상스, 혹은 근대 초 무렵이다. 시대상 맥락에서 첫 번째로 고려할 점은 저자가 강조하는 ‘자유’ 개념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자유 개념은 근대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근대 초의 자유 개념이 지금과 유사할까? 우선 자유란 낱말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자. 자유는 고대 그리스부터 탄생한 개념이다. ‘-이 없어야만 도달하는 상태'라는 정의로 원래 상태를 자유로 가정하고 자유를 가로막는 방해요소를 극복해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이후 중세로 넘어와선 신과 자유의 충돌을 막기 위해 중세인은 자유를 전통적 자유 개념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차용하였다. 즉, 인간은 신에게서 받은 자유를 이용해 신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모순적일 수 있는 신에 대한 복종과 자유를 '신이 주신 자유'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 자유의 폭은 넓어져, 종교를 넘어서고, 이후 자유의지 유무 등 여러 철학적 논쟁들이 이어져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는 자유 개념으로 통용된다.

  저자의 자유 개념은 완전한 근대라기보다 중세에 가깝다.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어디까지나 ‘신에게 받은 자유’를 전제하고 있어 따로 종교와 선을 긋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자유가 독재자의 굴종과 반대의 것으로 쓰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쓰는 자유 개념과 동치해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두 번째 고려사항은 그가 살았던 시기가 프랑스 왕정국가였던 점이다. 군주제 관료였던 그는 과거 로마 시대 공화정과 동시대 베네치아의 공화정을 현 군주제와 비교하며 오히려 군주제 독재를 비판한다. 비판의 화살이 군주 보다, 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관료와 군대, 민중들을 향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군주제가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권력임에도 민중들이 스스로 복종하여 유지하고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시기에 왕의 권력 크기는 어떠했을까? 절대왕정의 절정기는 아니었고, 절대왕정을 구축하던 시기였다. 다만 사후에 <자발적 복종>을 포함한 저작 모두의 출판을 몽테뉴에게 맡겼음에도, 몽테뉴가 이 책을 제외한 다른 책만을 출판했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이 책은 당시 불온서적 그 이상의 위험한 책이 됐을 것이다. 이 책이 프랑스혁명에 다다르기까지 약 250년 세월이 흘러야 했으니 몽테뉴의 결단은 상상 가능하다.

  저자는 후반부에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받은 모멸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행을 초래한 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처럼 불행을 참고 견디며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들에게 악습을 그대로 반복한다(p. 114).’

  이는 마치 모멸을 서로 떠넘기며 삶을 버텨가는 현대인과 닮았다. 

  <자발적 복종>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군주가 사라진 지금도 우리는 자본주의를 군주로 삼아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바쳐 스스로 굴종하고 있지 않은가. 군주는 우리가 굴종에 동의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너진다는 약 500년 전 저자의 주장에도, 우리는 오히려 군주를 신의 대리자처럼 신봉하며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만능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