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요약

르네상스, 제리 브로턴

권열 2020. 3. 25. 11:15


  르네상스는 역사 속에서 눈에 띄는 위치를 차지한다. 중세를 어둠으로, 근대는 빛으로, 그리하여 근대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인 르네상스를 눈부신 시점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저자 제리 브로턴은 이러한 르네상스 해석들이 19세기의 유럽 제국 시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된 것임을 주장한다. 이후 르네상스의 정의는 역사가마다 차이를 보이나 19세기 문화적 정신의 기원이 아닌 역사 속의 한 시대로 강조하게 되었다. 저자는 세계적 르네상스를 주장한다. 즉, 르네상스는 문화적으로 훨씬 혼합되어 있었고 그것의 영향은 유럽의 경계를 넘었다. 

  저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 그림을 인용하며 세계적 르네상스의 근거를 든다. 전쟁과 흑사병은 중세 역사의 침체와 쇠퇴를 유발했지만 이러한 격변은 새로운 부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는데, 상업기술의 발달은 열린 국제 거래로 동·서양 사이를 중재하는 상인 은행가를 등장시켰다. 특히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트노블 점령은 르네상스 예술·문화를 불러일으키는데 주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역·상업의 탐험 안에 다양한 문화 교류가 일어났고 예술의 경우 이슬람 형식과 이탈리안 형식이 혼합되는 새로운 예술 형태가 건축과 미술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향은 동·서양 모두 주고받은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엔 동양과 서양의 분명한 지리적 혹은 정치적 경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인문주의는 르네상스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동·서양 문화교류로 과거 서양문물이었지만 잊혔던 고대 그리스·로마 저작들이 동양에서 역수입해왔고, 지식인 집단은 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문주의가 말 그대로 인간성에 대한 탐구만은 아니었다. 인문주의를 교육하고 배웠던 것은 사회적 출세를 위한 노골적인 실용주의였기 때문이다. 문법과 수사학에 치우친 과도한 교육은 오히려 기존 체제나 후원하는 정치인을 만족시키는 굴종의 모습을 띌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문주의는 인쇄술을 만나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된다. 소수 엘리트 지식은 이제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민중들에게 퍼졌고, 파괴력은 가히 ‘지식혁명’에 가까웠다. 책에 대한 높은 수요는 문필문화를 끌어내, 작가들은 수요에 맞춰 공통의 속어를 사용하는 언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과감한 주장을 책을 통해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렇듯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모습이었다.

  지적 교류는 과학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동방에선 의학, 천문학 등 과학 분야에서 지적인 성취가 높았고 이를 서양이 역수입하면서 실용적 측면 이외에 이론적으로도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과거 서양의 지적 재산으로만 여긴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혁명도 실은 동방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태양계의 태양 중심 체계를 정의하는데 나시르 앗딘 알투시의 <<천문학 논고>> 에 ‘투시의 쌍원’ 개념 정리를 그대로 답습한 결과물이다. 이렇듯 르네상스 시대의 지적인 발전은 과거 정의처럼 서양 고유의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교류로 일어난 산물임을 증명한다. 

  르네상스는 격변의 시기였다. 교회와 국가의 대립과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외부에선 동·서양 교역에 관세를 지불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미지의 땅으로 탐험이 시작됐다. 새로운 곳으로의 탐험은 서양의 탐험이었지만 아랍인의 천문학과 과학을 매개로 하여 문화적 교류가 뒤섞였고, 탐험 이후에도 미지의 땅의 낯선 문화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탐험과 항해는 오늘날까지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이면에는 금, 은, 노예의 약탈이 시작돼 유럽 제국주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아메리카 신대륙은 거대한 노예 식민지이자 광산식민지가 되었고, 아프리카는 노예 공급원으로 쓰여, 오늘날 아프리카의 부와 불평등까지 이르게 되었다. 

  역사가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임을 대중적인 역사서인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도 지적했듯이, 르네상스에 대한 과거 해석은 이에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19세기 르네상스 해석은 주관성을 넘어 해석보다 식민주의 시대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였다. 르네상스를 역사의 한 흐름으로 보고, 유럽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적 시각에서 살피며, 근대의 태동기 이면에 착취를 고려한 제리 브로턴의 시각은 르네상스를 좀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제리 브로턴의 시각 역시도 역사 해석의 주관적인 입장임은 어쩔 수 없을 테지만, 무언가를 위해 정당화하지 않는 시각은 객관적이라는 낱말을 붙일 수 없는 역사해석에도 가까이 다다를 수 있는 태도와 접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