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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서평

밤은 부드러워라, 스콧 피츠제럴드

by 권열 2020. 4. 20.




책이 절판되지 않고 계속 나왔으면 좋겠어. 스코티가 친구들한테 아빠가 작가라고 말해놨는데 책을 구할 수 없다면 한동안 이상하지 않을까. (···) 25센트짜리 책으로 인쇄되어서라도 ‘개츠비’가 계속 사람들의 시야에 있길 바라. ‘그래도 안 되면 이 책은 인기가 없는 거지’. 그런데 잘될 가능성이 ‘있긴’할까? 그 시리즈에 넣어 보급판으로 다시 찍어내고, 서문은 내가 ‘아니라’ 이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쓰고, 그래서 학생들, 교수들,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해주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래도 죽으면, 완전히 가는 거지. 부당한 일이야. 그렇게나 정성을 쏟았는데. 지금도 이미 내 인지가 붙은 책은 미국 소설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어. 단지 ‘작은’ 규모로만, 나는 작가야.

얼마 안 되는 판매량을 보니 구매자는 작가 자신뿐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내게 말했다. 씁쓸하게 웃으면서

 

모린 코리건,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중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실패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그로부터 십 년 후 회심작, 『밤은 부드러워라』를 썼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겪은 실패를 딛고 쓴 새 작품은 어떤 내용일까 하는 호기심에 『밤은 부드러워라』를 읽었다. 평생 자전소설을 써온 것임이 다름없다는 평처럼, 이 작품에도 그와 닮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선 화자 닉과 주인공 개츠비 둘 다 피츠 제럴드를 닮았다면, 『밤은 부드러워라』에서 피츠제럴드는 자신을 더욱 닮은 주인공 딕을 그려냈다. 실패를 겪은 후 실패에서 결국 써 내려가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이라니. 

  피츠제럴드는 더 지독하게 자신과 닮은 딕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자신이 겪은 몰락을 딕에게 완전히 부여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구성부터 딕의 정점과 추락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책은 3부로, 각 구성에 시점을 달리하는 것이 소설의 특징이다. 1부는 로즈메리 시점, 2부는 딕의 시점, 마지막 3부는 딕의 부인 니콜의 시점이며 이들의 시선은 딕을 정점으로 오르게 하고, 내리막으로 추락시킨다. 

  1부에서 미성년인 로즈메리는 딕을 흠모한다. 로즈메리의 시선에 딕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질만한 유일무이한 존재다. 딕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조율을 훌륭히 해내고, 그가 건네는 대화와 행동은 완벽하게 빛난다. 로즈메리의 고백에 딕은 주저하다 마음을 받아들이지만 둘의 사랑은(불륜은)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채로 끝이 난다. 즉, 로즈메리는 딕의 환상을 영원히 품은 채로 이별을 맞이한 것이다. 

  2부에선 과거로 이동하여 딕이 전면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딕은 스스로가 자신이 전도유망한 젊은이인 것을 알고 있다. 정신의학자로 조현병 환자 니콜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딕을 마치 1부의 로즈메리처럼 사랑한다. 사랑의 선택권을 가진 딕은 니콜을 선택한다. 2부는 재빠르게 시간을 이동해 1부 끝을 다시 이어간다. 딕은 이제 자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낀다. 딕은 로즈메리를 찾아가 사랑을 진전시키지만 그들의 관계와 환상을 모두 망치고 만다.

  3부는 니콜의 시선이다. 딕은 2부 끝에 술로 인해 폭력 사건을 일으킨 후 끊임없이 술에 손을 댄다. 점차 양을 늘려가고 나중엔 매 순간 술에 취해있다. 마치 피츠제럴드가 남긴 말처럼(처음엔 당신이 술을 마시고, 다음엔 술이 술을 마시고, 그 후엔 술이 당신을 마신다), 그리고 피츠제럴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피츠제럴드와 딕은 술에 의해 모든 관계, 자기 일, 자기 자신을 망치고 만다. 그 모습을 니콜이 보며 처음으로 그의 진정한 모습을, 한심한 모습을 알아차리게 된다. 

  피츠제럴드는 조현병 환자인 니콜을 성장시킨다. 딕에게 의존적이었던 그녀를 독립시킨다. 과거 딕은 니콜에게 세상을 유일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딕은 그저 술에 찌든 한심한 놈일 뿐이다. 비로소 니콜은 딕을 내치고 다른 이와 사랑을 하고, 딕은 마침내 니콜에게 치료가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니콜뿐만 아니라 3부에도 등장한 로즈메리는 더는 딕을 사랑하지 않는다. 초라한 딕에게 예의를 차려 반응해 줄 뿐, 더 이상 그를 향한 애정은 남아있지 않는다. 결국 작가는 마치 소설 속에서 망가뜨려야 하는 것은 자신을 닮은 주인공뿐이라는 듯이 딕의 몰락에만 집중한다. 

  『밤은 부드러워라』의 실패 후 피츠제럴드는 『에스콰이어』 잡지에 「The Crack-up(무너져내리다)」를 발표한다. 자신의 비참한 생활상을 고백한 이 글로 피츠제럴드는 재기를 원했지만, 반응은 비웃음 뿐이었다. 사실 이 글은 절대로 비웃음을 살만한 글이 아니다. 무너짐에 대하여, 자기 확신의 붕괴에 대하여, 내밀한 그의 사유와 삶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글이다. 그러나 재즈 시대가 끝나고 대공황을 맞이한 시점에서, 재즈 시대의 아이콘이던 그가 나서서 자신의 무너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한물간 작가의 한물간 고백으로 밑줄을 긋고 경멸해 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제목 The Crack-up을 보자마자 읽지 않고 그랬을 테고, 어쩌면 피츠제럴드라는 작가의 이름을 보자마자 그랬을지도 모른다. 재즈 시대는 끝났고, 사람들은 피츠제럴드를 이미 끝난 작가로 마치 직전의 과거를 미련 없이 버리듯 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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