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
<숨결이 바람이 될 때>는 저자 폴 칼라니티의 마지막 2년을 담은 자서전이다. 그는 6년 차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레지던트를 마칠 해에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아 죽음에 직면한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장밋빛 미래를 앞두고 있던 그는 한순간에 죽음을 다루는 이에서 죽음에 처한 이가 된다.
뒤바뀌어버린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이야기한다. 의사인 그는 환자의 죽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민한다. 환자인 그는 자신의 죽음을 고민한다. 모든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삶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이 책 역시 죽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자는 삶과 죽음 이외에도 이 둘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을 밀도 있게 다룬다. 그것은 ‘정체성’이다.
의사인 그는 환자를 치료할 때 환자의 삶과 정체성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뇌수술은 인간의 핵심인 뇌를 다루기 때문에 정체성을 외면한 채 단순히 치료의 목적으로만 치중할 수 없다.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닌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는 잘 알려진 책,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는 특이한 정신병을 가진 개인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삶에 맞춘 처방을 내린다. 즉, 신경외과라는 직업은 삶과 죽음의 경계 그 이상, 앞으로 환자가 살아갈 이유에 관해 물음을 던지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환자인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싸우며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그대로 지키고 싶었다. 항암치료 화학 요법에서 독성이 덜한 물질을 선택한 이유도 자신의 손기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증세가 호전되자마자 그는 직업에 복귀했다. 그는 신경외과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글을 쓰는 삶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보탰다. 수술이 끝나면 자정이 넘어서까지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집필을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죽음을 앞둔 그가 한 가장 대담한 선택은 아이를 갖기로 한 결정이었다. 죽음을 앞둔 그의 선택은 현재진행 중인 삶이었다.
정체성 이외에도 저자는 의사와 환자 간의 구체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의사인 그가 자신의 환자들의 병에 대해 추상적으로 알고 있다면, 환자인 그는 이제 구체적인 고통의 느낌을 알게 된다. 환자에게 간접적으로 언급하던 기대수명 통계치에 대해서도 환자가 되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깨닫는다. 그는 병원 밖 환자의 삶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암이 완화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지라도 암 진단을 받기 전 생활 패턴으로 더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앞으로의 삶 곳곳에 죽음이 얽매인다는 것은 그가 환자가 되기 전엔 알지 못한 사실들이었다.
저자는 죽음에 대해 의연히 대처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도 스스로 선택하였다. 자신의 삶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순간까지 생에 머문 것이다. 그의 위엄있는 선택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그가 의사였기 때문에 자신의 병을 잘 알았고, 의학적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병에 대해 잘 모른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쉽사리 자신의 죽음에 자신이 배제돼버린다. 다양한 보험 상품을 고려하는 건 우리가 우리의 죽음에 속수무책이지 않도록 하는 최후의 수단일지 모른다.
책의 프롤로그는 저자가 썼지만, 에필로그는 저자의 아내가 마무리하였다. 이는 책이 저자의 죽음으로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아내는 에필로그에서 책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완성에 가깝다고 말한다. 서둘러 뚝 끊어진 것 같은 책의 마무리는 죽음을 앞둔 자서전에 역설적이게도 잘 어울리는 마무리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계속 살아가기’로 선택한 결과인 두 가지, 탄생한 아이는 미래를 살아가고 책은 사람들에게 죽음과 삶에 관해 묻는다. 결국, 저자의 삶은 그가 바란 대로 종결이 아닌 ‘계속 진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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