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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서평

무진기행, 김승옥

by 권열 2019. 11. 10.

<무진기행>에 대한 오늘의 서평

 


  작가 김승옥을 알게 된 건 영화 평론가 이동진 덕분이었다. 나는 평소 그의 추천 책을 신뢰하고 따라 읽곤 했는데 그가 인생 책으로 꼽는 <무진기행>을 읽지 않고 지나치기란 어려웠다. 지식인의 서재 인터뷰에서 이동진은 <무진기행>을 여러 번 필사 했다고 밝히며, 그가 필사한 이유는 작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이 너무 좋아서라고 말했다. 이후 나는 김승옥의 문학 세계로 들어가 그의 작품 전부를 좋아하게 되었다. 단, 작가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을 제외하고. 

  왜 하필 <무진기행>일까. 평소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설이 내게 맞지 않는다면 취향의 문제로 여기고 그 소설과의 인연은 끝이 난다. 그러나 <무진기행>은 이상하게도 오랜 시간에 걸쳐 끝까지 이해해보고 싶은 소설이다. 이런 나의 태도는 <무진기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 어떤 소설보다도 <무진기행>을 특별하게 여김을 의미한다. 수많은 해석을 읽어보아도 여전히 모호하고 여러 겹을 가진 이 소설은, 들어맞는 해석을 열린 채로 기다리는 매혹적인 텍스트이다. 나는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수많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무진기행>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첫째로 그것은 ‘귀향’의 테마에 있다. 귀향을 떠올려보자. 어떤 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향이란 장소가 그에게 익숙한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는 이들이 있고, 추억이 담겨있고, 옛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고향은 현재 자신의 실패를 품어줄 수 있는 공간이다. 만약 과거가 끔찍했다면 누구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진기행>에서의 귀향은 다르다. 주인공에게 무진은 자기 상실의 공간, 어두운 청년 시절의 기억이 가득한 공간이다. 주인공은 기꺼이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그곳은 역설적이게도 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의 주인공은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아내에 의해 거세당한 듯 살아간다. 하지만 무진은 다르다. 무진은 모든 욕망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안개에 쌓인 그곳, 주인공은 도착하자마자 역 구내의 미친 여자를 본다. 이후엔 자살한 창녀의 시체를 목격한다. 이런 과정에서 전쟁 중 골방에 숨어 스스로를 모멸하며 버티던 청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자기모멸의 감정은 주체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는 과거 자신과 닮은 하인숙과 사랑에 빠진다. 무진으로의 귀향은 죽은 삶이 아닌 살아있는 삶을 다시 체험하게 한다.  

  소설의 특별한 점 두 번 째는 하인숙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이다. 주인공은 하인숙에 대해 사랑의 충동을 느끼지만 실은 그가 가장 강하게 느끼는 건 연민이다. 연민의 대상은 하인숙이 아닌 과거 자신이다. 그가 하인숙을 사랑하는 태도는 마치 과거 어두운 자신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전보를 받고는 급히 무진을 떠난다. 하인숙에게 보내는 편지는 결국 찢어버린다. 무진을 떠나며 그가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이때 부끄러움 역시 하인숙을 향하지 않는다. 그보단 과거 자신에 대한 배반이다. 생의 의지를 버린 채로 거세된 삶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은 마치 성장소설의 역전이다.  

  동시대 비평가들은 작가 김승옥을 ‘감수성의 혁명’으로 칭했고, <무진기행>을 한국 문학 최고 단편으로 뽑았다. 소설 속 문장들은 세월을 이긴 채로 여전히 아름다워 읽을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소설이 뛰어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소개한 주인공과 하인숙 이외의 등장인물들, 엄마와 아내의 유사성, 조와 박의 대조는 소설을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해준다. 이 밖에도 소설 속 사건과 장면들은 풍부한 해석을 제공해준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오늘의 서평과 내일의 서평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오늘의 나의 서평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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