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이후 새로운 진단이 필요하다.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02) 는 매력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p) 저자의 의견에 따라 시대별 고유 질병을 떠올려 보자. 약 700년 전 유럽은 어땠을까? 위생개념이 없던 탓에 유럽 전체 인구 3분의 1이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다행히 19세기 중반 ‘크림 전쟁’을 계기로 위생 개념이 민간으로 퍼지게 되었다. 면역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곧이어 20세기 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시작으로 질병 연구는 마음의 병으로 뻗어 나갔다. 현대의 흔한 질병인 신경증은 겨우 한 세기 전의 산물이다.
저자는 현대를 신경증적인 것으로 진단하며 기존의 면역학적 시대와 달리 구분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이자 규율사회이다. 방어 대상은 타자이고, 타자는 명령을 내리며 나를 착취한다. 그러나 현대에선 나와 타자는 구분이 불분명해진다. 타자의 폭력도, 이에 대한 방어도 존재하지 않아 기존의 면역학적 체계로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중요한 논점은 나를 착취하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왜 일어난 걸까? 저자는 현대가 긍정의 과잉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지적한다.
저자가 말하길 사회가 긍정의 과잉으로 이동한 계기는 신자유주의 체제 때문이다. 기업은 노동자들로부터 생산성을 최대로 이끌어 내야 한다. 규율사회에서 손쉽게 가능하던 착취는 한계선을 가진다. 그러나 자기 착취가 가능하다면 노동자는 모두 자발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일한다. 성과주의에 자기 자신이 한 몸이 되어 최대 생산을 효율적으로 돕는다. 결국 긍정 과잉 시대는 현재 유지되고 있는 체제 안에 딱 들어맞는 옷이다.
이에 대한 실례는 국내의 자기계발서 열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자기계발 서적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때는 1990년대로 신자유주의 시기와 들어맞는다. 기업가의 성공담을 시작으로 경제, 경영과 같은 재테크로, 위로를 주는 심리 서적으로, 인문학 열풍으로 자기계발서는 모습을 달리 바꾸며 2019년 현재까지도 매년 순위에 이름을 올린다. 긍정 과잉이라는 진단은 고노동 사회인 대한민국에 가장 알맞은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암울한 시대에 대한 진단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한트케를 인용하며 미래에 대해선 다소 낙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피로사회가 분열이 아닌 근본적인 피로(화해의 피로)로 나아간다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추상적 결론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하지만 저자의 결론과는 다르더라도 현재가 긍정과잉 시대에 멈춰있지 않음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약 2년 전부터 유행한 신조어, 워라밸(WLB)과 욜로(YOLO)가 새로운 변화에 대한 증거이다.
워라밸은 Work-life Balance의 줄임말로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한다. 더 나아가 이를 우선시에 두고 직장을 구하는 태도다. 이러한 사고방식엔 스스로를 착취하는 피로사회와 다른 지점이 보인다. 욜로는 조금 더 극단적인 신조어이다. "You Only Live Once" 뜻으로, 인생은 한 번 뿐이기에 현재를 충분히 즐겨야 한다를 의미한다. 즉, 현재 자신이 즐길 수 있는 행복에 최우선 가치를 두어 삶의 결정을 내리고 소비하는 태도이다. 신조어와 맞물리는 삶의 방식은 단지 한 번의 물결과 같은 유행일지 착취당하는 삶에 대한 거대한 반발의 징후일지는 장기적으로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착취 시대를 넘어서 새로운 진단이 필요한 것임을 시사한다.
<피로사회>는 2012년에 쓰여 당시에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를 알맞게 진단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피로사회>의 통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지만 더 이상 일이 아닌 삶의 여가와 경험을 중시하는 물결을 미루어 보건대 2020년을 앞둔 이 시대엔 새로운 진단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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