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파괴하는 45년 전 블룸과 오늘날의 블룸들
최근 1194회에선 ‘가짜 펜을 든 사람들’을 제목으로 사이비 기자들의 행태를 고발하였다. 현재 국내 언론사는 과거보다 30배 이상 증가한 9000여 개이다. 그럼에도 심층 보도 형식의 깊이 있는 취재는 드물다. 방송에 따르면 이는 언론사가 수입이 되는 트래픽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극적인 기사와 클릭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근무시간 동안 실시간 검색어를 보고 기사를 쓴다. 기사는 기존에 다른 기사를 복사하고, 붙여넣는 것이 거의 전부다. 제목은 클릭 수를 최대로 끌어오기 위해 자극적인 단어로 바꾼다. 사생활, 논란, 사망 기사 모두 트래픽을 부르는 좋은 소재일 뿐이다.
얼마 전 연속된 연예인의 죽음도 기자들과 무관하지 않다. 네티즌의 악플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으나 기자들이 이를 부추겼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방송에서 보도하길, 기자들은 자신이 쓰는 글이 누군가의 목을 조여오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에 쉰 개에서 백 개 이상 기사들을 빠르게 붙여넣기 바쁘다. 하루의 기사 할당량을 성과처럼 최대한 채울 뿐이다. 기자의 책임과 윤리성 문제는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다. 45년 전 출간돼 언론에 폐해를 다룰 때마다 인용되는 고전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도 작가 자신의 경험과 동시대의 사건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선정적인 언론이 어떻게 개인의 명예와 인생을 파괴하는지를 소시민 블룸의 5일간 행적을 보고서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블룸은 선량한 인물이다. 자기 일에 꼼꼼하고 성실한 가정관리사이다. 그녀는 댄스파티에서 괴텐이라는 남자를 처음 만나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그가 경찰에 쫓기고 있음을 알자 도주로를 알려준다. 이 이유로 그녀는 경찰에 연행돼 심문을 받는데, 일간지<<차이퉁>>에 의해 ‘음탕한 여인’, ‘공범자’로 왜곡 보도된다. 연이은 자극적인 허위 보도는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다. 결국 그녀는 일간지 기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 후 제 발로 경찰을 찾아가 자백한다.
블룸은 자신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사생활에 깨끗함을 추구한다. 전남편과 이혼한 이유는 그가 추근거렸기 때문이었다. 댄스파티도 난잡하게 느껴지는 곳은 피했다. 그런 그녀에게 심문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치욕적일 수밖에 없다. 아파트 주민 한 두명이 목격한 ‘신사들의 방문’에 대해 수사반장은 괴텐과 연결해 끊임없이 캐묻는다. 이는 실제로 돈 많고, 유명한 한 남자가 블룸에게 고백하기 위해 찾아온 일이었음에도 그녀는 그저 침묵한다. 왜냐하면 밝힌다 해도 아무도 그녀의 거절을 믿지 않고 오히려 다른 추문이 열리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예를 지키려는 그녀의 노력은 일간지의 ‘정기적인 신사들의 방문’, ‘살인범의 정부’ 등 허위보도로 쉽게 무너지고 만다. 심지어 그녀의 집에 가득 찬 우편물들은 다양한 욕설로 그녀를 비난하고 음탕한 여자 취급을 한다.
블룸은 자신이 진술한 언어조차도 타인에 의해 오염돼버린다. 그녀는 진술서를 작성할 때 언어를 분명히 하는 꼼꼼함을 보인다. 남자들이 ‘추근거린다’를 ‘다정하게 대했다’라고 작성된 조서에 그녀는 분노하며 정정하길 고집한다. 그녀가 오직 ‘다정했다’라고 표현하길 원했던 것은 처음 본 괴텐에 대한 감정뿐이다. 그러나 허위보도 이후 그녀에게 추잡한 전화가 걸려오고 ‘다정함을 왜 멀리서 찾냐’라든가 우편물로 도착한 섹스 용품 목록에 덧붙인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정함이다.’라는 글귀는 그녀의 진심이 담긴 언어마저 빼앗아버린다. 결국, 그녀의 삶도, 명예도, 마음을 담은 언어조차도 모두 산산이 조각나버린다.
소설은 블룸이라는 인물 이외에도 구성에서 주목할만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선정적인 언론 보도의 내피를 감싸는 소설의 외피는 보고서 형식이라는 점이다. 보고서의 원천은 경찰의 심문 조서, 변호사와 검사를 통한 정보이다. ‘사실’을 근거로 하는 5일간의 기록은 일간지 허위보도와 대조를 통해 언론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둘째, 블룸이 기자를 살해했다는 결말을 소설 초반부터 알린 것이다. 만약 시간순대로 소설을 진행했다면 독자는 블룸의 마지막 행위로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복수’는 중요하지 않다. 살해를 저지른 ‘원인’이 중요하다.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하였는지,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의 삶이 왜 망가졌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결말을 앞서 둔 짜임새는 책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의 절반쯤 어떤 형사가 블룸을 위로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보도한 다른 신문을 가져다주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블룸은 말한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 이는 현재에도 자극적인 허위기사가 여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사람들의 욕망이 있기에 기자들의 행태는 더 지독하게 악순환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블룸은 기사를 쓴 한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이 시대엔 수많은 기사들이 양산되어 단 하나의 표적을 찾기 불분명해진다. 블룸을 괴롭힌 익명의 우편물과 전화는 행동성이 강하다. 요즘의 경우 이에 해당하는 인터넷 댓글은 더 손쉽고, 더 빠르며, 죄책감은 덜 들고, 심지어 기억에도 잘 남지 않는다. 그리하여 동시대 수많은 블룸들은 방아쇠를 이제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돌려 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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