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에 대한 해명
- <<침묵>>에서 본 유다의 변주
종교에 관한 책을 비신앙인이 독해할 때, 신앙을 진리에 연결시켜 독해하는 방법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진리를 다루는 현대인은 과학적 방법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언제든 전복될 수 있음’이라는 회의적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음’을 ‘진리’로 치환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 독해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결국 모든 책을 이해할 때 처럼 ‘텍스트-내’에 충실하거나, ‘텍스트-외’에서 시대적,역사적 맥락을 끌어오거나, 다른 텍스트와 교차하는 것이 최선 일 것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세 접근법 모두를 활용해 깊이 읽을 수 있는 좋은 텍스트지만, 이번 글은 세번째 방법에만 접목시켜 이어가고자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신부 로드리고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에서 선교를 하던 스승 페레이라의 배교 소식이 들리자 신부 로드리고와 가르페는 일본으로 향한다. 이후 일본의 신자들을 만나 숨은 채로 선교활동을 진행하지만 박해 상황을 직접 경험하게 되고 결국 잡혀 배교를 강요당한다. 소설엔 주인공 로드리고 이외에 중요한 인물이 한명 더 있다. 성화를 밟는 배교 행위를 여러 번 반복 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품고, 신부를 밀고하면서도 신부를 찾아가 고해를 반복하는 인물 ‘기치지로’다.
신부는 기치지로의 배신을 바라보며 유다를 떠올린다. 로드리고에게 유다는 배신자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기치지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매달리지만 로드리고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기치지로 또는 유다가 아니다. 로드리고는 자신을 예수의 위치에 옮겨 유다를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다인 기치지로에게 자신이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한다. 로드리고가 기치지로에게 품는 감정은 조금의 연민과 혐오와 분노다. 배반할 줄 알았던 유다를 향해 던진 예수의 말, “가라, 가서 네가 이룰 일을 이루어라.”를 로드리고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는 똑같이 기치지로에게 ‘가라, 가서 네가 행할 일을 하라’(p.157) 라고 속으로 외친다. 그러나 그것은 분노에 찬 꾸짖음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p.177)
로드리고는 기치지로의 항변에도(‘밟는자의 고통’) 여전히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 할 뿐이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한다. 로드리고는 자신이 배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당하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결국 배교를 선택한다. 신부는 동판에 새겨진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p.267) 신부는 동판을 밟기 직전 “아아, 아프다.” 라고 고통의 말을 내뱉는다. 드디어 밟는 자의 고통을 느끼며, 동판을 밟고, 배교를 하고, 예수의 위치에서 단숨에 유다의 위치로, 즉 기치지로의 위치로 추락한다.
성서에 대한 여러 의문들 중에 유다에 대한 의문이 있다. 유다에 대한 주된 해석은 ‘유다는 배반자’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신의 뜻이라면 유다의 배신도 신의 뜻이지 않을까? 라는 의문은 ‘배반자’ 해석으론 해결할 수 없다. 실제로 유다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1976년 이집트에서 발견되어 2006년 복원된 <유다복음>은 위경(가짜 경전)으로 여겨지지만, 이 기록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로 예수의 뜻에 의해 유다의 배신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슬라보에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에 대한 오래된 해석체계를 전복하는 책으로, 유다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유다의 배반은 기독교 성립에 필수적이다. 유다의 배반을 통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진정한 구원자가 된다. 유다는 영원히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을 알면서도 배반을 저질렀다. 이는 배반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다.
다시 <<침묵>>으로 돌아오자.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했다. 이는 신앙의 입장에선 명백하게도 배신의 행위다. 그러나 신부의 배교 행위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삶에서 영원한 ‘배교자’ 낙인을 감당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사랑의 실천을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예수의 위치에서 유다로 떨어뜨리면서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결국 그의 배반으로 완성되었다. 소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신앙 체계, 순교와 배반을 뒤집는다. 자신을 위한 순교와 타인을 위한 배교, 이는 유다의 배반이 역으로 위대할 수 있음을 <<침묵>>을 통해 완벽히 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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