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카버의 소설을 좋아하나요?
레이먼드 카버는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단편소설 작가로 ‘더러운 리얼리즘'의 대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하층계급에서 일어나는 가족 내 균열과 일상을 썼고, 이것은 소시민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카버 단편의 또 다른 특징은 ‘미니멀리즘’이다. 이는 다른 작가의 단편과 비교해도 짧은 편이며, 카버는 불안과 균열 직전의 범위 정도만을 이야기로 다룬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이 온전히 카버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2007년 <뉴욕타임스>에서 <에스콰이어> 소설 편집자 고든 리시가 카버 소설에 끼친 영향을 게재하였고, 이는 문단의 대형 스캔들이 되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편집자는 능동적으로 작품에 개입한다. 하지만 고든 리시의 개입은 과도했다. 카버의 작품 대부분 원본에 비해 절반 이상 잘려 나갔고, 특정 작품은 약 78% 이상 덜어내었다. 리시는 분량뿐만 아니라 내용, 문체, 제목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카버는 문학적 입지를 다지고자 리시의 태도에 반발하다가도 결국 수용하였다. 끝내 둘은 결별하고, 카버는 리시로 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자신만의 문학적 성과를 이루어간다. 그러나 이 스캔들은 고든 리시의 ‘극도의 미니멀리즘적’ 태도가 카버의 초기 단편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므로 논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카버의 최초 원고는 <<풋내기들>> 단편집으로 출간되어, 독자는 카버 소설의 수정 전과 수정 후를 비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든 리시의 개입 전후 카버의 소설은 얼마나 다른 차이를 보일까? 리시가 편집한 <욕조>(<<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문학동네, 2005)와 이 소설 원본인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대성당>>, 문학동네, 2007)을 비교해보자. 소설은 한 엄마가 아이의 생일을 맞아 빵집에서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면서 시작된다. 생일 당일 아이는 차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 채 깨어나지 못한다. 빵집 주인은 기간이 지나도 케잌을 찾아가지 않자 항의의 표시로 그들 집으로 전화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병원에서 계속 아이 곁에 있던 엄마는 자신이 아이를 지켜보지 않아야만 아이가 의식을 회복할 수 있단 절실한 마음에 잠시 집에 들린다. 마침 그녀가 집에 도착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와이스 부인"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런데요. 제가 와이스 부인인데요. 스코티 때문인가요?"
"스코티 때문입니다."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요. 스코티와 관련된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p.87)
소설 <욕조>는 이렇게 끝이 난다. 독자는 이 전화가 빵집 주인일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전화를 받는 주인공은 병원에서 온 소식인지, 아이를 차 사고 낸 범인과 관련있는 일인지 알지 못한다. 병원에서 걸려온 소식이라면 아이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희소식인지 그 반대일지 모른 채로 불안한 기운을 남기는데, 이야기 진행상 후자에 기울어질 예감을 남긴 채로 끝이난다. 이렇듯 고든 리시가 관여한 카버의 소설은 대체로 불안과 균열의 틈에 툭 던지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치 절벽에 몰려 발을 헛디디는 순간 소설은 종결되고 앞으로 무한한 절망만 남은 듯이 말이다.
이 소설의 원본은 어떨까. 카버는 이야기를 더 나아간다. 아이는 결국 죽는다. 부모는 집에 돌아와 또다시 빵집 주인의 장난전화를 받고, 그제야 전화를 건 사람이 그인 걸 눈치챈다. 부모는 빵집에 찾아가 빵집 주인에게 화를 내며 아이가 그날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빵집 주인은 곧바로 사과한다. 갓 만든 롤빵과 커피를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는 말과 함께 내민다. 그들은 허겁지겁 따뜻한 롤빵을 다 먹는다. 빵집 주인은 아이가 없는 중년인 자신의 삶과 빵을 만드는 일 등에 대해 그들과 오래 대화를 나누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밤에서 이른 아침까지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빵집에 머물고 창에선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치며 소설은 끝이난다.
두 소설을 비교하면 재밌는 점이 있다. 고든 리시가 관여한 소설엔 아직 아이는 살아있고 깨어날지 말지 모르는 불안 속에 놓여있다.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거대한 절망, 즉 ‘아이의 죽음’을 그린 것은 오히려 카버의 원본이다. 하지만 역으로 따뜻하고 위로를 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렇듯 카버가 쓴 이야기는 서사를 좀 더 진행한 후 연대, 희망, 위로를 준다. 특히 위로의 형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관계에서, 모른다는 것을 먼저 인정한 후(“내게는 아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지금 당신들의 심정에 대해서는 간신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라오”(p.126)), ‘듣기’를 통해 위로를 준다.
카버는 고든 리시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품 중 정점으로 꼽힐 <대성당>을 썼고, 이 소설에선 다른 방식으로 연대를 구성해낸다. <열>이나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말하기-듣기 방식’으로 타인에게 위로를 줬다면, <대성당>에선 주인공은 이해하지 못하는 맹인의 삶을 맹인인 그와 같이 손을 잡고, 눈을 감고, 함께 대성당을 그려봄으로써 체험한다. 듣는 일은 연대감을 준다. 그러나 타인이 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함께 대성당을 그리는 행위는 타인이 되어볼 수 있는 일체감을 선사한다. 타인이 되어보는 것은 불능을 넘어선 그 이상,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제 눈을 뜨고 보라는 맹인의 말에도 주인공은 계속 눈을 감고 한 마디 내뱉는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p.311)
카버는 자신의 커리어의 정점을 스스로 해냈다. 하지만 이전작도 마찬가지로 카버의 소설임은 틀림없다. 편집된 소설은 휼륭하고 카버의 원본 역시 빼어나다. 편집본이 극한의 미니멀리즘으로 카버의 스타일을 구현해내며 균열과 분열 속에 이야기를 던진다면, 카버만의 소설은 더 나아간 이야기로 희망과 연대를 보여준다. 리시의 영향 하에 출간된 단편 중 원본이냐 편집된 완결본이냐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다. 어쩌면 이는 당신이 선호하는 이야기의 끝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일지 모른다. 당신은 어떤 카버의 소설을 좋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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