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는 여러 각도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기능으로 역할을 시작한 미술이 그 자체의 예술로 가치를 얻게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원시시대의 주술에서, 신의 표상으로, 중세의 성경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현실의 한 단면으로, 마침내 화가가 모든 선택권을 갖게 되는 순간까지. 앞으로 미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짐작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미술의 역사도 고정불변하지 않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기술적인 각도로 미술을 살펴볼 수 있다. 이집트의 그림에서 ‘보이는 대로가 아닌 아는 대로’ 그리기 시작한 것을 출발로, 이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과정을 거쳤으나, 인상주의에 이르러선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 맞는지에 관해 철저한 물음이 시작된다. 결국 아는 것과 보는 것을 확실히 분리하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다양한 실험들이 이어진다. 셋째로, 미술의 규칙과 관습에 대해 익히고, 전 세대의 문제점을 규칙과 관습을 깨면서 해결하고, 새로 탄생한 양식 역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다시 이를 해결하고자 관습을 깨는 일련의 과정으로 미술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마치 기존의 학설을 반박하고 새 이론이 등장하는 다른 학문의 과정과 유사한데, 다만 흔히 ‘진보’라고 판단하는 일을 미술의 측면에선 부인해야 한다. 마치 과학철학에서 토머스 쿤이 주장한 패러다임 개념처럼 전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나타난 새 패러다임이 ‘진보’이거나 ‘더 낫다’라고 말할 순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미래가 유동적이듯이 미술사의 과거 또한 유동적이다. 특정 시기의 특정 양식으로 정리한 과거는 발굴된 작품으로 부정되고, 얼마든지 재정의될 수 있다. 미술사 역시 역사이기 때문이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는 실제로 읽으면 왜 이 책이 서양미술사에 관한 입문서로 명성이 높은지 납득할 수 있다. 다만 책이 쓰인 시기가 약 1950년대이기 때문에 발간 후 28장이 덧붙여져 현대 미술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있지만, 미술사의 흐름에서 르네상스 이후로 가장 중요할 수 있는 인상주의와 그 이후 현대미술에 관해서 알고 싶은 이들은 이 책을 입문서로 읽은 후 다른 책을 통해 좀 더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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